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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한상엽
6·25전쟁 3년 1개월 동안 서울이 적 치하에 넘어간 시기는 제1차 3개월(1950.6.28~9.27), 제2차 2개월 남짓(1951.1.4~3.13) 총 ‘5개월 10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1950년 10월 27일 제1차 서울 환도 이후 불과 2개월 만에 서울을 다시 중공군에 넘겨준 혼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유엔군은 1951년 3월 14일 제2차 서울 수복 이후에도 민간인의 서울 복귀를 엄격히 통제하고, 한국 정부의 환도를 종전 이후로 미룰 것을 권고했다.
6·25전쟁 발발 직전 서울 인구는 170만여 명이었는데, ‘국군의 반격’ ‘수도 사수’ 등 오보가 이어지던 개전 직후 사흘 동안 서울을 탈출한 제1차 피란민은 24만여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146만여 서울시민은 인민군 치하에서 고초를 겪었고, 제1차 서울 환도 이후에는 ‘인민군 부역자’로 내몰리지나 않을까 마음 졸였다. 1950년 12월 초부터 정부 주도로 제2차 피란이 시작됐을 때, 100만명 이상의 서울시민이 피란길에 올랐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은 ‘텅 빈’ 서울에 입성했고, 두 달 후 서울이 재수복됐을 때 서울 인구는 13만여 명에 불과했다.
한 달 뒤인 1951년 4월 서울 인구는 45만여 명으로 회복되지만, 이기붕 서울시장은 “현재 서울은 유엔군이 작전 중이고, 수도·전기·식량·연료 등 생필품 보급이 어려우므로 시민들은 서울로 귀환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공식적으로 서울시민의 귀환은 금지됐지만, 1951년 여름부터는 후방에서 ‘도강증’ ‘농민 복귀증’ ‘귀향 허가증’ 등을 발급받은 시민에게 제한적으로 귀환을 허용했다. 서울 인구는 1951년 12월 65만여 명, 1952년 12월 72만여 명, 1953년 휴전 전후에는 100만여 명으로 회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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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2년 11개월 동안 수도 기능을 상실했다. 그동안 대전(1950.6.27~7.15 : 19일), 대구(1950.7.16~8.17 : 33일)도 각각 한 달 남짓 임시수도 기능을 했지만, 대부분의 기간(2년 9개월) 임시수도는 부산(1950.8.18~10.26, 1951.1.4~1953.8.14 : 1023일)이었다. 중앙청은 경남도청, 대통령 관저는 경남도지사 관사, 국회는 부산극장, 사회부·문교부는 부산시청, 상공부는 남선전기 사옥에 자리 잡았다.
부산 피란민 수용소 주방(?)을 。검 중인 UN 측 인사. 1950년 9월 18일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부산으로 행정과 구호물자가 집중되면서 피란민의 유입도 급증했다. 제1차 피란 시기 전국 110만여 명 피란민 가운데 16만여 명, 제2차 피란 시기에는 북한에서 집단 월남한 피란민을 포함해 전국 500만여 명 피란민 가운데 26만여 명이 부산으로 유입됐다. 1949년 47만여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1951년 84만여 명으로 격증했다. ‘공식 통계’에 잡힌 인구가 그 정도였고, ‘피란민 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은 ‘자유 피란민’까지 포함하면 1·4후퇴 직후 부산 인구는 12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전쟁 발발과 함께 인구가 1년 만에 두 배 이상 불어남에 따라 부산은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전쟁터’가 됐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피란민에게 제공할 숙소·식량·물·전기·일자리 등도 턱없이 부족했다. 분뇨처리조차 녹록지 않아 ‘화장실 인심’마저 사나워졌다.
오늘날 부산의 수돗물 생산량은 하루 100만t 이상인데, 당시 부산에서는 인구 30만 명이 사용하기도 빠듯한 하루 3만t 남짓 수돗물이 생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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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수도 누수가 심해 실제 공급은 2만t에도 못 미쳤다. 100만 명에게 하루 20L씩 공급할 수 있는 양으로, 오늘날 한국의 1인당 하루 수돗물 사용량 305.9L의 6.5%에 불과했다. 군대·발전소·선박·관공서에 우선 공급하고 나면, 일반 가정에는 수돗물이 2~3일에 한두 시간씩 찔끔 공급되다 끊겼다.
“밥 한 그릇은 나눠줘도 물 한 그릇은 나눠줄 수 없다”는 말이 유행했고, 수도꼭지, 우물 덮개마다 잠금장치가 설치됐다. 증기기관차가 물을 구하지 못해 출발이 지연되는가 하면, 육군병원에서는 붕대·환자복·침구류 등 위생용품을 수돗물로 세탁하지 못해 매일같이 부녀자 수백 명을 군용 트럭에 태워 낙동강까지 가서 빨래해 날라야 했다.
부산에 신세 질 만한 지인도 없고 월세를 감당할 능력도 없는 피란민들은 피란민 수용소로 밀려들었다. 제1차 피란 때에는 극장·공장 등 대규모 건물들을 중심으로 피란민 수용소가 설치됐다. 40여 개 수용소에 7만여 명의 피란민이 수용됐다. 제2차 피란 이후 피란민이 격증하자 여관·요정·적산가옥은 물론 한겨울에 공터·축사·공동묘지까지 나무 기둥을 세우고 천막을 쳐서 피란민을 수용했다.
피란민 수용소에 입소하려면 ‘사상 검증’을 거쳐 ‘피란민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다. 피란민으로 등록되면 죽지 않을 만큼 식량과 일용품을 배급받을 수 있었지만, 심사 과정에서 공산당원으로 판정나면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월남 피란민들은 심사 때 의심을 사지 않도록 사실과 상관없이 자신이 ‘공산당에 땅을 빼앗기고 월남한 대지주’라고 둘러댔다. 월남민 다수가 ‘북한 대지주 출신’으로 알려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피란민으로 가득 찬 부산 ‘도둑 시장’(‘국제시장’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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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일에 걸쳐 담배, 껌, 전기 제품, 제복, 담요, 식료품 등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늘어서 있다. 1951년 1월 8일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수용소에서 나온 피란민들은 국제시장, 부두 등 시내 중심가 근처에 ‘하꼬방’(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하꼬방 주민들은 국제시장에서 행상이나 짐꾼을 하거나 부두에서 하역 노동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다. 밤에 부산항에 입항한 외국인 선원들은 용두산·복병산 등 고지대에 빼곡히 들어선 하꼬방 불빛을 보고, 부산에 고층빌딩이 많은 것으로 착각해 놀라기도 했다.
폐목재나 종이 상자로 대충 지은 하꼬방은 화재에 취약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으려면 초롱불, 아궁이 불, 난롯불을 피우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이 귀해 작은 불도 초기에 진화하기 어려웠고, 밀집해 지은 탓에 한번 불이 나면 이웃한 하꼬방으로 옮겨붙어 대규모 화재로 확대되기 일쑤였다. 연이은 화재로 ‘났다 하면 불’이라는 말이 생겼다.
전쟁 전 47만여 명이 살았던 부산에서 임시수도 1023일 동안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궁핍하나마 죽지 않고 아등바등 살아남았다. 악조건 속에서도 숙소·식량·물·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하루하루 ‘전쟁’을 치른 성실한 공무원들, 무뚝뚝하지만 피란민들을 외면하지 않고 품어준 부산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마저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 문헌>
강혜경, ‘한국전쟁기 서울 경찰과 후방 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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